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스 데이비스 (문단 편집) == 여담 == * 1959년 [[뉴욕]]에서 클럽 연주 후 바깥에 잠시 쉬기 위해 나간 사이, 인종과 관련해 백인 경관과 시비가 붙어[* 하도 인상이 더럽다보니 백인 경관이 마일스를 범죄자로 의심하여 신분증을 검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백인 경관이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까지 지껄이며 검사를 강행하자 발끈해서 욕으로 맞불을 놨다가 그 경관을 빡치게 만들어 경찰 곤봉에 쳐맞고 만다.] 머리를 얻어맞아 머리가 깨진 적이 있다. [[http://i11.photobucket.com/albums/a182/nick_dagan/miles_davis_1959-2.jpg|당시 기사]] 이 때문에 이 사건 이후 백인 관객들에게 등을 돌리고 연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자 이것도 또 다른 인종차별이 아니냐며 많은 팬들이 항의하기도 했는데,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드류는 "마일스는 일종의 지휘자임. 연주할때 뒤돌아 보는 것도 그런 거임"이라는 꽤나 억지스런 변명을 대신 해주기도. 사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머리가 깨지기 전부터 공연 매너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곡이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면 무시하고 다른 곡을 연주하거나, 신청곡(특히 초창기의 발라드 곡들) 요청이 있으면 대놓고 씹거나, 기분 나쁜 얼굴로 자기 구두짝만 쳐다보며 연주하거나 등등... 한 마디로 [[슈게이징]]. 본인이 워낙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탓에 '수준 떨어지는 관객' 따위하고 소통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 양반이 이런 [[개떡]] 같은 무대 매너로 시종일관 자기 연주만 챙겨대는 짓을 해도, 공연장은 매번 만석이었다. * 여자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기로도 유명했다. 정식 결혼은 못했지만 사실혼 관계였던 아이린 커손부터 시작해서 첫 번째 부인이 된 무용가 프랜시스 테일러, 두 번째 부인이 된 펑크 가수 베티 마브리, 세 번째 부인이 된 배우 시슬리 타이슨, 그 후 동거녀로 죽기 직전까지 지낸 조 겔바드 등이 그의 매력과 카리스마에 이끌렸지만, 음악 활동 때처럼 이내 싫증이 나면 여자도 갈아치운다는 식의 생활 방식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피눈물을 흘리며 이혼 혹은 결별했다. 그나마 마일스가 죽어갈 때까지 간병을 하며 곁에 머물었던 겔바드 정도가 그럭저럭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겔바드도 마일스가 가끔 빡치면 자신을 두들겨 팼다고 회고할 만큼 [[나쁜남자]] 기질이 다분했던 모양이다. 어느 여자든 간에 자신이 애정이 있으면 직접 요리도 해주고 장도 봐줄 정도로 극진했지만, 애정이 식으면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혹은 그 이하로 취급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마일스의 자서전이 나왔을 때 [[페미니즘]] 인사들이 엄청나게 깐 것도 대부분 이 여자 관계 때문이었다. 여자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들과의 관계도 무척이나 나빴다. 어쨌든 마일스의 음악과 사생활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늘 필요했고, 부인이 된 세 여성들은 모두 적어도 한 번씩은 마일스의 음반 커버에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차례대로 프랜시스는 Someday My Prince Will Come과 E.S.P., 시슬리는 Sorcerer, 베티는 Filles de Kilimanjaro의 앨범 커버에서 볼 수 있다.] 아이린과 지내던 풋풋한 뉴비 시절 때는 그녀와 가끔 여유가 생기면 크림 소다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바의 이름을 딴 Sippin' at Bells라는 곡을 작곡했고, 이 곡은 지금도 재즈 스탠더드 넘버로 리얼북에 올라와 있다. 이외에도 Fran-Dance와 Mademoiselle Mabry 역시 각각 프랜시스, 베티와 사귀고 있었거나 결혼했을 때 만들어진 곡들이다. * 체력 단련을 위해 [[권투]]를 대단히 즐겼고, 덕분에 다른 트럼페터들보다 체격이 튼튼하고 군살이 거의 없는 멋진 몸을 가질 수 있었다. 잭 존슨에게 앨범을 헌정한 것도 스스로 권투 덕후임을 인정한 셈. 하지만 이런 장점은 약쟁이가 되었을 때는 별로 득이 되지 못했다. 특히 욱하는 성격 때문에 그 권투 실력으로 부부싸움을 비롯한 주먹다짐을 일으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거나 황색언론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쨌든 마일스는 자기 아들들에게도 권투를 배울 것을 적극 권장했고, 아들 중 한 명은 이후 [[미군]]에 입대해 주독미군에서 군 생활을 할 때도 군 체육대회에 권투 선수로 참가해 우승하기도 했다. * 그와 같이 음악을 했던 연주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멤버보다는 항의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멤버들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쩔어서 남이 하는 충고나 얘기는 잘 안들었다고. 어쩌라는 건가 싶겠지만, 이게 마일스의 본질 그 자체다. * 그는 여러 실험적인 음악 장르를 많이 시도했지만 유독 전위적인 [[프리 재즈]]만큼은 인정하지 않았다. 본인 자서전에서 말하기를 '오넷 콜맨 등 프리 재즈 연주자들이 자기 전공 악기가 아니라 아무 악기나 막 연주하는 건 선배들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리 재즈를 싫어한다'고 밝혔다. 이유가 좀 설득력이 없다. * '누구누구와 사이가 안 좋더라' 라는 식의 [[카더라]]소문이 많다. 위에서 언급된 [[델로니어스 몽크]]와의 [[떡밥]]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과거 드러머인 맥스 로치와도 여자 문제로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고도 한다. 소문 외에도 아예 공인된 설전까지 벌였던 찰스 밍거스 같은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 다음 가는 떡밥으로는 퍼스트 퀸텟과 섹스텟의 멤버였던 존 콜트레인과의 관계인데, 원체 콜트레인 자체가 마일스에 버금가는 위대한 음악가였던 탓에 팬들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을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는 편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콜트레인에 대해 매우 오만한 사람이라는 내용의 인터뷰가 2012년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위에 있는 내용들처럼 당연히 설득력이 없는 말이고(...) 저 인터뷰에서도 콜트레인의 음악에 대한 태도는 크게 칭찬했다.] 그런데 오만함 그 자체였던 마일스와 달리 콜트레인은 무척 겸손했고 Only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으로 전해진다. 콜트레인 외에도 마일스가 거의 안 깠던 동료 음악인으로 웨인 쇼터가 있으며, 마일스의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된 할리우드 보울 콘서트에서도 특별히 Happy Birthday to You를 인용한 솔로 연주를 관객으로 듣고 있던 쇼터에게 선사하기도 했다(그 날이 마침 쇼터의 생일이었다). * 목소리가 매우 걸걸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이런 목소리는 아니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5CvG3jEGr9w|#]] 본인 자서전에 따르면 1955년 성대 폴립 수술을 받고나서 가능한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음반제작진과 계속 소리높여 언쟁을 하다가 평생을 그러한 목소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분류:마일스 데이비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